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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더블유 모먼츠] 두 개의 테루아, 하나의 영혼, 앙리 지로(Henri Giraud) 샴페인

[오주석의 더블유 모먼츠] 두 개의 테루아, 하나의 영혼, 앙리 지로(Henri Giraud) 샴페인
Photo by Daniel Vogel / Unsplas

두 개의 테루아, 하나의 영혼: 앙리 지로 샴페인의 혁신과 전통

"Ne rien industrialiser, ne s'obliger à rien, faire du bon vin naturellement" — Claude Giraud (서명: Henri Giraud) "아무것도 산업화하지 말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며, 좋은 와인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라"

400년의 역사, 끊임없는 혁신의 정신

아침 햇살이 따뜻했다. 아이(Aÿ) 마을로 향하는 길, 1625년부터 현재까지 약 400년 동안 이어져 온 앙리 지로(Henri Giraud)의 정원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360도 뷰를 볼 수 있는 건물과 엘리베이터를 건설 중이었다. 이곳에서 와인 메이킹의 혁신을 이끌고 있는 세바스티앙 르 골베(Sébastien Le Golvet)를 만났다.

"우리 와인은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팅도 필요하죠. 우리의 와인이 다이아몬드라면, 그 세팅이 바로 아르곤 숲의 오크입니다."

세바스티앙의 이 한마디는 앙리 지로의 브랜드 정체성을 집약했다. 앙리 지로가 특별한 이유는 두 개의 테루아(terroir)를 결합했기 때문이다. 아이(Aÿ)의 그랑 크뤼 포도밭과 아르곤 숲의 오크를 결합해 유일무이한 샴페인을 탄생시킨다.

두 개의 점, 두 개의 테루아

앙리 지로 두 개의 점

앙리 지로의 로고에는 두 개의 점이 있다. 하나는 아이 마을을, 다른 하나는 아르곤 숲을 상징한다. 이 두 지점은 단순한 위치가 아닌, 앙리 지로의 철학적 토대를 형성한다.

아이는 남향의 포도밭으로, 충분한 일조량을 받으며, 20cm 정도의 진흙층과 200m 정도의 백악층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토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백악 토양은 와인에 미묘한 짭짤한 맛(salinity)과 요오드(iodine)의 뉘앙스를 부여한다. 또한 아이는 마른(La Marne) 강에 인접해 있어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와인에 신선함을 더한다.

하지만 앙리 지로의 진정한 특별함은 아이에서 동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아르곤 숲에서 자란 오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세바스티앙은 클로드 지로의 철학을 이어받아, 오크 역시 포도나무처럼 고유의 떼루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샴페인 하우스 가운데 오직 앙리 지로가 유일하게 아르곤 숲의 오크 원산지를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와인 세계에서는 샤또 라뚜르가 이런 접근법을 따르죠."

건축가가 아닌 창작자의 정신

"혁신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전에 했던 것이나 가지고 있는 지식에만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머물러 있으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세바스티앙은 앙리 지로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건축가가 아닌 창작자'로 정의한다. 기존의 방식만 고수하는 건축가와 달리, 창작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앙리 지로는 다양한 혁신을 시도해왔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오크통의 사용 방식과 샌드스톤 암포라의 도입이다.

세바스팅앙 르 골베, 앙리 지로 양조 책임

앙리 지로가 사용하는 오크통은 단순한 숙성 용기가 아니다. 국립산림청(ONF)의 도움으로 아르곤 숲 내의 특정 구역을 선택하고 관찰하면서, 나무의 벌목부터 건조, 통 제작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통을 굽는 방식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샴페인 하우스가 15-30분 정도 오크통을 굽는 것과 달리, 앙리 지로는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동안 특별히 고안된 굴뚝 시스템을 통해 통을 서서히 굽는다. 이는 불꽃과 연기가 목재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하여 와인에 잡미가 스며드는 것을 차단한다.

2016년 이후로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사용을 중단하고, 대신 사암(샌드스톤)을 구운 달걀 모양의 암포라를 도입했다. 약 6,000유로에 달하는 이 특별한 용기는 2cm 두께로 매우 얇지만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내구성이 뛰어나다. 달걀 모양은 내부 와인의 순환을 돕기 때문에 와인과 리(Lees)의 접촉을 최대화하는 장점도 있다.

시간과 정교함의 예술

본격적인 테이스팅이 시작되었다.

시음 와인

첫 번째 와인은 앙리 지로 아이 그랑 크뤼 MV19였다. 1990년부터 숙성된 리저브 와인 33%와 2019년산 포도(피노 누아 80%, 샤르도네 20%) 67%를 블렌딩하여 깊이 있는 풍미를 지닌다.

세바스티앙은 와인 양조를 포뮬러 원에 비유했다. "완벽함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작은 디테일들이 있습니다. 경주에서 1/1000초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죠. 와인에 담긴 작은 디테일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MV19를 테이스팅하면서 입 앞쪽에서 강한 미네랄감이 느껴졌고, 약간의 클레멘타인과 뒤에서는 요오드와 조개껍질 향이 감지되었다.

두 번째 와인은 에스프리 나뛰르였다. 이 와인은 친환경적으로 생산된 샴페인으로, 살충제 잔여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테이스팅 중 한국과 프랑스에서의 와인 맛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와인은 생명체와 같습니다. 여행을 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또한 고도, 기압, 습도 등 많은 요소들이 와인의 표현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세 번째 와인은 앙리 지로 아이 퍼페츄얼 리저브 20-90 브뤼였다. 이 와인은 1990년부터 해마다 축적한 리저브 와인과 2020년 빈티지를 함께 블렌딩한 특별한 샴페인이다. 퍼페츄얼 리저브 병에는 작은 로고가 새겨져 있는데, 별이 떨어지며 만드는 원형의 시간선이 그려져 있다.

"시간선은 별이 떨어질 때 만들어지는 원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 와인을 마실 때 당신은 시간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시간을 들이고, 실제로 즐기는 시간을 확장시키죠. 시계에 신경 쓰지 않는 순간, 당신은 정말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와인은 앙리 지로 아르곤 2016 브뤼 그랑 크뤼였다. 이 와인은 앙리 지로의 최고급 라인으로, 아르곤 숲의 오크로 만든 배럴에서 숙성된 프리미엄 샴페인이다.

"이 와인의 병에 있는 사각형(Square) 로고는 콜베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콜베르는 프랑스의 재무장관이었고, 아르곤 숲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배의 돛대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배에서 Square는 명령이 내려지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아르곤은 그 배의 지휘 센터와 같고, 우리 와인의 중심 부분입니다."

브랜드 경험 관점에서의 인사이트: 새로운 시도와 도전

앙리 지로의 철학은 브랜드 경험 설계에 중요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세바스티앙은 앙리 지로의 철학을 등산에 비유했다.

"등산가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세요. 정상에 오르는 일반적인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일반적인 길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브랜드도 기존의 관행을 넘어 새로운 경험의 길을 찾아야 한다. 앙리 지로가 두 개의 테루아를 결합해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형성한 것처럼, 브랜드도 서로 다른 가치와 경험을 융합하여 차별화된 경험을 창출할 수 있다.

세바스티앙

그는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정상에 도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탁월함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더 편안한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앙리 지로의 사례는 브랜드가 어떻게 전통과 혁신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고유한 경험을 창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소비자에게 시간을 초월한 가치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다.

오주석의 더블유모먼츠_앙리 지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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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경험 설계자, 오주석은 현재 바람익스피리언스(BARAM Experience) 대표다. 브랜드 경험 차원 연구로 경영학 박사(Ph.D. & DBA)를 마쳤다. 산업정책연구원(IPS) 연구교수다.  WSET Level 3, 프랑스 와인 스콜라(FWS), 이탈리아 와인 스콜라(IWS)를 취득했다. 와인 브랜드와 도시 브랜드를 경험으로 연결한다.

『어쩌다 B, 스치듯 떠나는 유럽 여행』 저자, 『와인은』 공동 저자 및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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